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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 군인이자 정치인. 전 국방부장관, 국가안보실장인 그는

49년생 올해 70세입니다.


전북 임실군 출신으로 전주북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제20회]하고, 1972년 육군사관학교 제28기로 임관하여 우리나라 합동참모의장까지 지냈습니다. 2008년에 예편했으며, 최종 계급은 우리나라 육군 대장입니다.



그는 19년 2월 2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김태업 부장판사]는 군형법상 정치관여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여 김관진 전 장관에겐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단 별도의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는 점과 구속적부심을 통하여 풀려났습니다는 점을 고려해, 법정구속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2010년 11월 23일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인하여 전임 김태영 장관이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하자, 26일에 그 후임 장관으로 내정되었고 다음달 4일 정식으로 우리나라 제43대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김관진 장관 취임사 전문 그리고 2014년 6월 1일, 전임인 김장수 실장의 후임으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후보자로 내정되었습니다. 이임 후, 국방장관직은 후임인 전 합참의장 한민구 장군이 맡게 되었습니다. 퇴임후엔 국방부를 동원해 여론조작을 저지른 정황과 증거서류가 발견되고 재판 중에 있으며, 군형법상 정치관여 혐의로 1심에선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외에도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의 주동자임이 밝혀져 진척중인 재판이 하나 더 생겼는데요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학업 성적이 우수해 육사 기수 중 1명만 선발하는 서독 유학 시험에 합격, 한국에선 1학년을 마친 후 서독 육군에선 졸업까지 하고 왔습니다. 당시 그가 수학했던 1969년 뮌헨의 서독 육사는 우리나라와 유사한 처지의 후진국 출신 생도들이 유학 중이었고, 그중 한 달에 60$[$]로 생활해야 했던 김관진 생도는 졸업할 때까지 그럴듯한 식당에선 식사 한 번 못 해봤다고 합니다.





독일 육사가 학사 학위를 주지 않은 탓에 잠시 학력이 고졸로 처리되었습니다. 육군에선 보상으로 서울대학교 위탁 교육을 제안했지만 자기는 군인이 되기 위해 임관했습니다며 거절했습니다. 후에야 학력이 인정되고 육사 명예학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1972년 육군 보병소위로 임관해 32사단 수색중대 소대장과 12사단 52연대 전투지원중대에선 소대장을 지냈습니다. 서울대학교 학군단인 101학군단 교관을 지낸 후 서독 육군 전투병과학교에선 고군반을 이수했습니다. 귀국 후 수방사에선 203차량화보병대대 3중대장을 지내고 육군보병학교 전술학처 전술교관을 거쳤습니다.



영관급 장교 시절 육군대학 정규경과를 이수했으며, 대통령경호실 경호요원으로 파견근무를 했습니다. 이후 15사단 50연대 2대대장을 지냈으며, 동사단에선 작전참모를 지냈습니다.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대책계획총괄장교를 지냈으며 국방대학원 안보경과를 이수했습니다. 이후 국방부 818기획단 법규과장을 지냈습니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선 26기계화보병여단장을 지냈는데요, 이때 수기사의 차상급부대인 제7기동군단장 이현부 중장[육사 20기]이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순직했습니다. 이후 합참 전략기획본부 군사전력경과와 대통령비서실에선 근무했습니다.


장군으로 진급한 후 7사단 작전부사단장을 거쳐 육군교육사령부 전투개발부 차장을 지냈습니다. 이후 준장 요직인 우리나라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과 육본 전력기획참모부 전략기획처장을 지냈습니다.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35보병사단장과 육본 기획관리참모부장을 지냈습니다. 기획관리참모부장 후임으로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이 맡게되었습니다.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2군단장과 중장 요직인 합참 작전본부장을 역임했습니다.



군단장 시절 2003년 10월 1일에 열린 국군의 날 제55주년 기념행사에선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을 받았습니다. 작전본부장 시절 이라크 파병을 총괄하였는데요, 상당히 중요한 보직이라 이때부터 뉴스에 노출되는 빈도가 꽤 높아졌습니다. 2004년 우리나라를 뒤흔든 김선일씨 사건 당시 이라크 파병과 부대 선 회의 등에 참여했었습니다. 10월 14일에는 국회 국방위원회에 가서 동해안에선 잠수함 추정 물체 출현 첩보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이후 대장으로 진급하여 제3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강원도 명예 도민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한편 2005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자이툰 부대 방문을 다룬 '대통령님, 한번 안아보고 싶습니다'에 저자로 참여했습니다. 2006년, 군 최고 서열인 우리나라 합동참모의장이 되었습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김태영 국방장관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군인사를 불신하며 여러 국방장관 후보자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요, 누군가 김관진을 추천하였고 그와의 대면에선 몇 시간 동안이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고 합니다. 대담의 내용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도발이 있을 경우 가장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피력한 점이 장관 후보로 발탁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인사청문회에선 증여세나 건보료 탈루 의혹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연평도 포격 도발이라는 전례없는 도발행위로 인해서 그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장했던 김관진의 인사청문회는 많은 문제 없이 통과되었습니다. 취임 초기부터 재임 기간 내내 강경한 대북정책의 입장을 취해왔던 터라 김관진이 국방부 장관 재임 시절에는 전군에 선조치 후보고의 매뉴얼이 매번 강조되었습니다. 1 취임 첫날, 연평도 방문 北, 추가도발시 항공기 동원 폭격, 선조치 후보고



2013년 3월 22일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 내정했던 후임 국방장관 후보자인 예비역 육군대장 김병관 장군이 인사청문회 경과에선 온갖 비리가 드러나 자진 사퇴함으로써, 김관진 장관이 유임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국방부 장관이자 박근혜 정부의 첫 국방장관으로서 국방업무를 계속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뒷얘기가 좀 있는데요, 골치 아픈 일도 다 그만두니 유학 중인 딸이나 보려고 관사에선 짐 다 빼고 미국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다가 덜컥 유임 결정이 내려졌습니다고... 말년이라고 무시하던 실무자들이 유임 후 굽신굽신하는 모습을 꼬집기도 했습니다.